조선 사신들이 명·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한 횟수는 낮게 잡아도 1500회가 넘는다. 길은 외길이었다. 해로를 이용하던 명·청 교체기를 제외하면 오백 년 내내 한양~의주~연경으로 이어지는 노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사신단은 궤도 위를 다니는 열차처럼 동일한 궤적을 밟았다. 또 같은 숙소를 쓰고, 비슷한 의식과 절차를 가졌다.
조선-청나라 간의 조공 질서가 무너지던 19세기 후반, 1894년을 마지막으로 연행길이 끊겼다. 13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왜 지금 연행길을 답사하는가.
열하 기행은 길에서 사상가 연암을 만나고, 불멸의 여행기 '열하일기'를 현장에서 읽는 독서 여행이었다. 그런데 조선 연행의 자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산업화의 여파로 길이 끊기고 대지는 이리저리 파헤쳐졌다. 연행의 옛길을 좇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기행단은 버스에 몸을 싣고 연암이 밟았던 장소와 장소를 이어갔다. 끊어진 옛길은 '열하일기'의 기록을 떠올리며 채워갔다.
기행 이틀째인 14일, 우리는 연행단이 통과했던 책문, 봉황산성을 거쳐 첨수참에서 점심을 먹은 뒤 청석령 고갯길을 걸었다. 청석령은 연행길에서 드물게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여전히 인적은 드물다. 산이 깊고 험해 산업화의 힘이 미치지 못했으리라. 청석령 길은 사절단들 사이에 험준하기로 악명 높던 고개다. 넓게 펼쳐진 고원은 강원도 평창의 목장지대를 연상시킨다. 아래쪽은 온통 옥수수밭이고 중턱부터는 개암나무밭이다. 길가에는 마타리, 갈퀴나물, 쑥부쟁이, 익모초 같은 들꽃이 형형색색 피었고, 고갯마루 아래 길섶에는 어저귀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벽돌을 쌓을 때 틈새가 나지 않도록 석회에 잘게 썰어 넣는다고 연암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바로 그 풀이다.
연암은 246년 전 음력 7월 7일(양력 8월 6일)에 청석령을 넘었다. 그때도 한여름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열하일기'에는 청석령에 오르는 정경과 연암의 생각은 없다. 청석령 정상 관제묘에서 역관과 마두들이 분향하고 참외를 먹은 에피소드만 보인다. 수국, 옥잠화, 촉규화, 석류나무 등 초목의 이름을 꼼꼼히 적었던 연암이 이 구간을 걸어서 넘었다면 어저귀를 비롯한 들꽃을 놓쳤을 리 없다.
청석령은 병자호란을 전후해 조선인 포로들이 넘었던 원한의 길이기도 하다. 1637년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가 되어 찬 비 속에 청석령을 넘던 봉림대군은 그 때의 참담함을 시조로 남겼다. '청석령 지나거냐 초하구 어디메오~'로 시작하는 '호풍음우가'다. 역사지리에 해박했던 연암이건만 이런 고사도 '열하일기'에는 없다. 기와 조각이나 쇠똥까지 놓치지 않고 살피고 의미를 부여했던 그의 치열한 기록 정신을 생각하면 의외다.
청석령 기록의 부재는 양반문화가 갖는 한계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연암은 한글을 등한시했다. 수많은 편지를 남겼지만 한글 편지는 한 통도 없다. 연구자들은 그가 한글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한문에 자유로웠던 그에게 이 땅 사람들의 한(恨)이 담긴 한글 시조는 굳이 새겨둘 텍스트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여기에 신분의 조건이 겹친다. 홍수로 엿새가량 통원보에 발이 묶였던 연암은 무더위 속에 산길을 재촉했다. 연암은 견마를 잡힌 채 말을 타고 고개를 올랐을 것이다. 더위에 지친 그는 풍광을 살필 겨를이 없었고, 관제묘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까. 말을 탄 자와 말을 끄는 자의 시선이 갈린 그 길에서, 연암은 걷는 자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하지 못했다.
연암의 청석령 길에는 겸재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산'이 겹쳐 보인다. 그림 속, 고개 위에서는 양반들이 말과 가마에서 내려 금강산의 장관을 감상하는데, 경사진 고갯길에서는 말을 끌고 가마를 메는 고된 노동이 이어진다. 연암의 연행길 이면에도 마부, 종 등 하인들의 노고가 있었다. 근대적 사유를 제시하고 노비와 종에게 관대했던 연암은 정작 자신의 화려한 연행 뒤에 감춰진 신분 질서를 의식하지 못했다. '열하일기' 청석령 기사에서 겸재의 그림이 겹쳐 보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sido1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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