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북 접근법엔 정책은 있지만 전략은 없다. 전략이란 공간과 시간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엮어내는 고도의 두뇌 싸움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북한 문제만 나오면 보수와 진보의 도식적 논리에 갇혀 너무 뻔한 패를 내보인다. 반면에 북한은 우리보다 전략적 사고에서 훨씬 앞선다. 수를 감추고 허세를 부리며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등 자원의 열세를 머리로 극복하려 한다. 미·북 정상회담 추진에서도 정부는 '전략 없는 정책'의 익숙한 전철을 밟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실패하면 과거보다 훨씬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칫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주는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대북 접근엔 전략이 없어
미·북 정상회담 추진도 마찬가지
공간의 전략으론 열려야 하지만
시간의 전략 없인 회담은 또 실패
북한과 지정학이라는 '넓은 공간'을 조망할 때, 미·북 정상회담이 열려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처럼 핵과 경제가 상충하는 구조에서 북한 내부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경제를 살리려면 개혁개방이 필요하고 시장화를 촉진해야 하지만 이는 김정은의 독재 권력을 위협한다. 핵에 과잉 투자하고 민생에 과소 투자하는 기형적 구조는 장기적으로 정권의 내적 기반을 갉아먹는다. 문제는 이 같은 북한의 내부 모순이 외부의 지정학적 격변과 합쳐질 때 그 위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는 러-우 전쟁이라는 돌발 변수가 북한의 야심과 결합해 어떤 안보 위기를 초래하는지 생생히 목격하고 있다. 파국을 몰고 올 수 있는 이런 위험한 결합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대화의 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미국 정치라는 '좁은 공간'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는 미·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보기 드문 기회다. 그의 임기가 끝나고 통상적인 대통령이 집권한다면, 돌발 위기가 터지지 않는 한 북한 문제는 정책 우선순위 서랍 깊숙한 곳에 방치될 공산이 크다. 방치된 위험은 사후 수습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키운다. 따라서 트럼프 임기 내에 한반도 문제 해결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방향 설정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시간의 전략'을 들여다보면, 지금은 미·북 정상회담의 적기가 아니다. 지정학적 판도로 볼 때 지금은 북한의 시간이다. 북한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병력을 러시아에 지원하는 대가로 군사·경제·외교적 이익을 얻고 있다. 이 국면에서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북한은 높아진 몸값을 앞세워 사실상의 핵 보유 인정을 압박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대신 '북핵 동결' 수준의 합의로 외교적 치적을 포장하려 한다면, 한국의 핵심 안보 이익은 후순위로 밀려날 수 있다. 지금 회담이 열리면 북한 핵이 암묵적으로 용인될 위험은 크고, 비핵화의 물꼬를 틀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의 시간은 영구적이지 않다. 장기전의 승패는 결국 경제력이 좌우한다. 서방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러시아는 전쟁의 비용을 부담할 국제 지원 연합이 없다. 전쟁 직전 GDP의 7%에 육박했던 국부펀드의 유동 자산은 현재 2%에도 미치지 못한다. 불어난 전비와 재정 적자는 고금리와 민간 투자 위축으로 이어져 러시아의 경제력을 잠식한다. 이는 러·우 전쟁의 승패나 휴전의 방향이 트럼프 임기 안에 정해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뜻이다. 이처럼 모스크바가 평양에 쥐여준 '지정학적 후광'의 유효기간은 마냥 연장될 수 없다.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뼈아픈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당시 정부는 평창올림픽 북한 참가를 계기로 너무 성급히 비핵화 협상의 시간표를 열었다. 그러자 북한의 친미화(親美化)를 두려워한 중국은 북한의 든든한 뒷배가 되기 시작했다. 경제제재가 북한의 셈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전에 정상회담 국면으로 진입한 탓에, 미북의 기대치는 하노이에서 극단적으로 충돌했다. 제재의 축적과 지정학적 지렛대로 북한의 핵 매도 가격이 매수 가격에 수렴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판을 벌인 전략적 조급증의 결과였다. 지금 정부에 필요한 것은 러시아가 만들어 준 북한의 일시적 호기가 소진될 때까지 기다리며 협상력을 축적하는 일이다. 러·우 전쟁의 향배가 갈리고 러시아의 대북 지원 여력과 북한의 전략적 자신감이 약해지는 바로 그 때를 파고들어야 한다.
페이스메이커는 주자에게 한 방향만 보고 일정한 속도로 달리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자의 완급과 경로를 치밀하게 설계하는 전략가여야 한다.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는 것보다 열리는 편이 낫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성공은 만남 그 자체에 있지 않고, 북한의 협상력은 낮추고 한미의 협상 방안은 더 정교하게 만드는 지략에 달려 있다. 우리 정부는 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조급함을 버리고, 공간과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비핵화를 위한 협상력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워싱턴의 시간만 바라보고 서두를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와 평양의 시계가 돌아가는 속도를 함께 읽어야 한다. 협상의 주도권은 결정적 변곡점을 포착하는 '시간의 전략'에서 나온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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