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금요일 퇴근 무렵, 반도체 설계 오류를 잡아낸 연구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장 바로잡아야 할까, 아니면 다음 근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까. 지금 한국의 근로시간 제도는 이 질문에 '기다리라'고 답할 것이다. 반도체, 인공지능(AI)을 둘러싼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은 결국 '인재를 얼마나 신속하고 유연하게 투입할 수 있는가'의 싸움인데도 말이다. 반도체 미세 공정이나 AI 모델 개발과 같이 특정 시점의 기술 우위를 놓치면 격차를 되돌리기 어려운 산업일수록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 인재를 투입할 수 있는 인력 운영의 유연성이 기술 격차를 좌우한다. 문제는 우리 기업들이 반세기 전 제조업 시대에 설계된 경직된 근로시간 제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점이다.
반면 일본과 중국은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근로시간 유연화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일본은 최근 근로시간 규제를 한층 더 완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의 법정 근로시간은 우리와 같은 1일 8시간, 1주일 40시간이지만 연장근로는 1주 단위로 운영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월 45시간, 연 360시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에 더해 노사가 특별 조항을 체결하면 월 100시간 미만까지 연장근로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후생노동성은 그동안 특별 조항을 체결한 사업장에도 행정지도를 통해 연장근로를 월 45시간 이내로 낮추도록 유도해왔는데 이러한 행정 관행도 이달 폐지했다. 연장근로의 법정 상한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근로시간 총량보다는 가산임금 인상, 대체휴가 부여 등 '건강·복지 확보 조치'의 이행 여부를 중심으로 행정지도가 이뤄진다.
일본은 이와 함께 세분화된 예외·특례 제도를 통해 업종별 근로시간 유연성도 폭넓게 확보하고 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을 최대 1년(한국 최대 6개월)까지 허용하고 있으며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 기간도 전(全) 업종 대상 최대 3개월(한국 원칙 1개월, 연구개발 3개월)까지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일본은 신기술·신상품 연구개발(R&D) 업무에 대해서는 연장근로 상한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중국 역시 근로시간 관리의 유연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노동 행정 부처의 승인을 받으면 근로시간을 주·월·분기·연 단위로 묶어 그 기간의 평균으로 관리할 수 있는 '종합계산공시제'를 두고 있어 근로시간을 주 단위로만 관리해야 하는 우리나라보다 선택의 폭이 넓다. 여기에 더해 중국은 경영진 등 표준적인 근로시간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직무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규제 자체를 적용하지 않는 '부정시근로시간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 일부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그 적용 범위를 연구개발 직무까지 넓혀가는 추세다.
이처럼 경쟁국들이 국가전략산업의 특성에 맞춰 근로시간 제도를 계속 손질해가는 동안 우리는 연구개발 조직 하나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운 경직된 틀에 갇혀 있다. 아무리 우수한 기술과 인재를 보유하고 있어도 그 역량을 제때 쏟아부을 수 없다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력에 획일적인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결국 국가 경쟁력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이다.
물론 근로시간 유연화 조치가 모든 근로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국가전략산업에까지 획일적인 규제를 고수하는 것이 맞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마침 정부가 국가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메가특구특별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전면적인 노동법제 개정에 앞서 '메가특구'에서부터 근로시간 유연화를 시작해볼 필요가 있다.
연구개발·전문직 등 핵심 인력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 주 단위로 고정된 연장근로 관리 단위의 월·분기·반기·연 단위로의 확대,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의 활용 기간 확대 등을 우선 검토할 수 있다. 이름뿐인 지원책만으로는 기업을 움직일 수 없다. 근로시간 유연성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설계하더라도 투자는 결국 다른 나라로 향할 것이다. 국가전략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근로시간 유연화 조치가 조속히 검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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