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정부가 서울 용산공원 부지를 활용한 대규모 주택 공급을 추진하면서 논쟁이 뜨겁다. 주거난 속에서 공원 개발을 고민한 도시는 서울만이 아니다. 12년 전 독일 베를린에서는 주민투표로 템펠호프 공원 부지 개발을 막았지만 주거난이 심화하면서 개발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9년 전 홍콩 정부는 자연공원 일부를 개발하려다 공론화를 거쳐 계획을 유예했다. 주택 공급을 위해 공원 개발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녹지를 지켜야 한다는 반론 사이에서 두 도시는 어떤 선택을 해왔을까. 한국일보는 용산공원의 미래를 둘러싼 논의에 참고할 수 있게 두 도시의 현장을 취재했다.
'베를린 시민들이 얼마나 이 공원을 아끼는지 보이지 않나요?'
지난달 29일 독일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원은 8월의 마지막 주말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붐볐다. 총면적 303만㎡.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심 녹지 공간 중 하나로, 서울 여의도 공원의 13배에 달하는 광활한 이 공원에서 가족 단위 방문객들은 연을 날리거나 공놀이를 했다. 바비큐 전용 공간은 고기 굽는 시민들로 넘쳐났고 공원 한쪽에선 축제가 한창이었다. 2008년까지 활주로였던 도로 위는 롤러스케이트와 자전거족이 독차지했다. 공원에서 휴식을 즐기던 40대 후반 여성 프란체는 기자에게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자유를 느낀다'며 '이 공간을 절대 빼앗길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는 20일 베를린 지방선거를 앞두고 템펠호프 공원 부지 개발을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하자 이를 경계한 것이다. 2014년 5월 베를린 시민들은 주민투표로 과거 공항부지였던 이 공원에 주택 4,700채를 건설하려는 의회 시도를 저지했다. 도시 열섬 현상을 완화하고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시민의 휴식 공간을 지키자는 명분이었다. 서울 용산공원(243만㎡)에 주택 1, 2만 채를 공급하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고민을 12년 전에 한 셈이다.
용산공원과 면적· 건설 규모 비슷
그러나 지난 12년간 베를린의 주택난이 더 극심해지자 시의회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CDU)은 개발 가능성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주택 문제 심각성을 깨달은 시민들 생각도 달라졌을 거라는 논리였다. 2024년 개발 관련 아이디어를 공모하기 시작했고 올 5월 건축가 한스 콜호프와 토비아스 뇌퍼가 이 공원 가장자리에 아파트 2만1,400채를 건설하는 안을 내놨다. 12년 전보다 세대 수가 4배 넘게 증가했다. 이들은 공원 전체가 아닌 3분의 1에 해당하는 부지에만 짓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에 베를린 투자은행(IBB)이 이 계획에 대한 경제 타당성까지 검토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12년 후 베를린 시민들의 생각은 달라졌을까.
템펠호프 공원이 특별한 이유
사실 베를린에는 공원이 넘쳐난다. 도심 정중앙에 위치한 티어가르텐 공원 면적만 210만㎡에 달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템펠호프 공원이 특별하다고 강조한다. 이날 공원에서 만난 마크 슈네펜지프(58)는 '베를린에서 시야가 트인 개방된 공간은 이곳이 유일하다'며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고, 연을 날릴 수 있고 음식도 해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원 3분의 1 부지에만 짓는다고 하지만 실제 주택이 들어서면 우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음악을 크게 틀 수도, 자유롭게 달릴 수도, 일출과 일몰을 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아이와 함께 연을 날리던 르네 크렘핀(42)도 '나 역시 4인 가족이 지낼 더 넓은 집을 구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공간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 소중하다'며 '주택은 다른 공간에도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베를린 시민들의 생각은 주택 개발안에 64.3%가 반대표를 던졌던 12년 전과 변함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공원을 찾은 시민들 이야기였다. 슈네펜지프도 '공원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주택 건설에 반대할 것'이지만 '베를린은 큰 도시이고 이곳에 한 번도 안 왔거나 이 주변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주택 건설에 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극심한 주택난에 찬성 여론 급증
실제 이날 베를린 시내에서 만난 알렉산더(32)는 '공원 전체를 주택으로 채울 필요는 없지만, 부분적으로 건설할 필요는 있다'며 '집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임대료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2년 전에 주택 건설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바꾼 것 같냐'는 질문에는 '많진 않지만 최소 25%는 생각을 바꿨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도 이 같은 의견을 뒷받침한다. 올 4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템펠호프 공원 주변에 주거 공간을 추가 조성하기 위한 개발'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59%가 "지지한다"고 답했고 "반대한다"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그만큼 주거난이 심화했다는 뜻이다.
연방 주택∙도시개발∙건설부가 2016~2025년 주요 도시 임대료 상승률(신규 매물 기준)을 분석한 결과, 베를린이 69%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임대료 상승에 주택마저 부족하다 보니 집을 구하려면 면접은 물론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건 기본이다. 인맥을 총동원하거나 직접 '집을 구한다'는 전단지를 길거리에 붙이는 경우도 흔하다.
'이번 선거는 공원 개발 찬반 투표'
이 때문에 오는 20일 지방선거는 사실상 '2014년 주민투표 재대결'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선거 결과가 개발 여부를 결정하진 않는다. 2014년 주민투표 결과가 법률에 반영돼 현행법상 템펠호프 공원 개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원에 주택을 지으려면 주민투표를 다시 하거나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사실상 베를린 시장 후보로 선거를 진두지휘하는 CDU의 슈테판 에버스는 '이번 선거는 템펠호프 공원 개발에 대한 투표'라며 '유권자들이 CDU를 지지하면 법 개정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선거 결과를 발판으로 법 개정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이다. 여론조사에서 CDU와 1, 2위를 다투는 좌파당(Die Linke)은 대형부동산 기업의 보유 주택 공공소유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베를린= 정승임 특파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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