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소설가
축제 같았던 영화 촬영 현장
청년들 모두 영사기가 발하는
빛보다 찬란한 청춘을 보내길
난생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연기를 잘하느냐고? 그럴리가. 사연은 이렇다. 늦깎이 대학생인 내게 한 학생이 단편 영화를 연출한다며, 출연을 부탁했다. 작품에는 중년 남성 한 명이 등장한다. 아울러, 이 영화로 학내 영상제의 수상을 노리는데, 영상제에는 본교 재학생만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학생이면서 중년 남성 역할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는 셈이었다(심지어 학생인 주제에 웬만한 교수보다 나이가 많다. 쩝).
현장에 가보니, 모두가 아는 사이였다. 영화동아리에서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호흡을 맞춰온 학생들은, 서로 이가 잘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은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동선으로, 예정된 동작을 수행했다. 그러니 내 차례가 되자, 모두 노심초사할 수밖에. '과연 저 아저씨는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물론 나도 연기를 해본 적이 있다. 첫 대학생 시절, 그러니까 무려 30년 전 '극예술연구회'라는 연극동아리에서 연기를 해본 것이다. 한데, 그건 이 학생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당장 오늘 점심때 먹은 것도 기억 안 나는 판국에, 수십 년 전 잠시 해본 연기가 기다렸다는 듯 부활할 리 없다(게다가, 그때에도 연기를 못했다. 엉엉). 더욱이 촬영을 해보니, 맙소사. 연극 연기와 영화 연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연극은 현실 세계와 다소 동떨어져 있다. 연기는 무대 위에 속한 것이고, 배우는 가면과도 같은 분장을 한다(어떤 배우는 메이크업을 정말 가면처럼 두껍게 한다). 배우는 극장 구석에 앉은 관객도 들을 수 있게끔 발성도 목청껏 한다. 이런 낯선 세계로의 진입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일단 그 세계로 발을 디디면, 어느 순간부터 배우는 연극이라는 우주에만 속한 존재가 된다. 대사 한두 개쯤은 실수해도, 극(劇)은 우주의 질서를 깰 수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간다.
한데, 영화는 수시로 이 리듬이 깨진다. 관객이 스쳐지나듯 보는 한 장면은 사실 여러 번 반복 촬영된 것이다. 즉, 여러 테이크(take)로 찍은 것인데, 이 테이크를 반복할 때마다 배우는 현실의 세계로 복귀한다. 감독이 '컷'을 외치면, 극의 세계는 깨져버린다. 스태프들은 기다렸다는 듯 조명의 밝기와 카메라의 각도에 대해 열띠게 논한다. 그러다 갑자기 '레디' 소리가 들리면, 배우는 홀로 그 소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카메라에 담은 제 모습, 즉 어느덧 역사 속으로 흘러가버린 과거의 자신을 똑같이 재생해내야 한다.
심지어, 영화에는 훼방자도 포진해 있다. 연극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상대 배우만 보이지만, 영화 촬영장에서는 시선에 거대한 마이크가 들어온다. 카메라를 보고 연기할 때에는 카메라 뒤로 스태프들이 적군처럼 배우만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관객이 보는 영화 속 상황과 배우가 연기해야 하는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나는 이날 시한부 인생을 사는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맡아, 깊은 슬픔 속에서 연기해야 했다. 한데, 9월인데도 반바지를 입고 온 한 촬영팀 남학생의 무성한 다리털이 내 시선을 앗아갔다. 이 남학생의 다리털은 아마존의 밀림처럼 우거져서, 모기 몇 마리쯤은 그 털에 낀 채 여전히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내 영혼을 지배했다. 그 와중에 '레디!' 소리가 들리면 갑자기 촉촉한 눈으로, 슬픔에 갈라진 목소리로 대사를 해야 했다. 그러니, 영화 연기는 얼마나 고된 일이고, 이에 반해 영화 감상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나저나, 출연료를 받았냐고? 그럴리가. 고작 5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드는데,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는 서른 명 가까이 된다. 이 모두가 돕겠다는 마음으로, 아니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 감정은 내가 예전에 밴드를 할 때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느꼈다. 영화 촬영은 밴드처럼 청춘이라면 한 번쯤 겪어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 이 젊음의 축제에 끼어준 학생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모두 영사기가 발하는 빛보다 더 찬란한 청춘을 보내길.
최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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