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접한 스페인령 세우타에서는 바다를 헤엄쳐 스페인 영토로 몰려드는 난민들로 인해 긴장사태가 촉발됐다. 배경에는 스페인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북아프리카에 있는 스페인령 세우타는 원래도 스페인으로 밀입국하는 아프리카인들로 몸살을 앓아왔다. 그래서 스페인 법은 '국경 차단 시설'을 무단으로 넘은 밀입국자를 복잡한 송환 절차 없이 즉석에서 돌려보내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법 규정에 빈틈이 확인된 사건이 발생했다. 한 알제리인이 바다를 헤엄쳐서 스페인으로 밀입국했다. 바다에는 철조망이나 검문소 같은 '국경 차단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바다를 헤엄쳐 온 밀입국자도 '국경 차단 시설'을 무단으로 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스페인 대법원은 이에 대해 "아니다"란 답을 내놨다. 인위적으로 설치한 시설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바다는 '시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석 송환은 안 된다"는 것이 스페인 대법원의 결론이었다.
여기까지는 법에 관한 이론적 논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바다로 밀입국하면 추방하지 않는다는 괴소문이 퍼졌다. 유럽연합(EU)의 일원인 스페인 시민이 되려는 모로코인들의 목숨을 건 바다 수영이 끝없이 이어졌다. 8만명 정도가 바다를 건넜고, 100명 이상이 그 과정에서 익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스페인 당국은 바다를 건넌 밀입국자 8만명을 돌려보내기 위해 막대한 행정력을 투입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밀입국자를 송환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결국 사태는 대혼란, 행정력 낭비, 무엇보다 많은 인명 피해만 남기고 끝났다. 스페인 대법원은 법의 공백으로 인해 밀입국자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정의로운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왜 대혼란과 참혹한 죽음이었을까.
불분명한 정의의 실체
사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 법원의 공식 슬로건은 '자유·평등·정의'다. "자유가 존중되고 평등이 실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다"는 것이 법원의 설명이다. 이 중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사법부의 이미지는 정의다. '정의로운 판결',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이상적 모습이다.
그러나 정의는 실체가 불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제러미 벤담,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이 정의가 무엇인지를 논해왔다. 이렇듯 반복적으로 질문과 답이 다시 나오는 그 사실만 보더라도, 무엇이 정의라고 말하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 어느 시대에 놓이느냐에 따라 답이 다르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다른 정의를 포기해야 한다면 정의를 좇은 결과가 불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숙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스페인 정부는 세우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가짜뉴스' 탓으로 돌리고 있다. 스페인 대법원은 그런 뜻으로 판결하지 않았는데, 일부 악한 세력이 가짜뉴스를 퍼뜨린 탓에 소요가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스페인 대법원이 이 참극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미 불법 밀입국으로 몸살을 앓는 상황에서 육상 국경의 '시설'과 바다 국경은 다르다는 메시지가 과연 최고의 법 전문가 집단인 대법원의 정밀하고 복잡한 법리 그대로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리라 기대해도 될까.
사실 우리는 정의의 절충에 익숙하다. 많이 알려진 '소멸시효'와 '공소시효'의 예를 들어보자. 소멸시효는 아주 쉬운 말로 설명하면 "오래된 빚은 안 갚아도 된다"는 말이다. 돈을 정말 받을 생각이면 빨리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하고, 그렇게 안 했으면 돈 달라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길게는 10년, 짧으면 1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된다.
공소시효로 인해 죄를 짓더라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더는 처벌할 수 없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범죄가 발생한다. 제한된 수사 인력으로는 매년 새로 발생하는 범죄를 수사하기도 벅차다. 그렇다고 무한정 수사 인력을 늘릴 수도 없다. 그래서 법은 너무 오래 해결되지 못한 미제 사건은 더는 처벌하지 못하게 한다. 수사기관에는 너무 오래 한 사건에만 매달리지 말고 여러 사건을 해결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받을 돈이 분명히 있지만 돈을 떼여야 하고, 죄는 분명히 지었는데 벌을 받지 않는다니 정의 관념에 너무도 반한다. 그러나 너무 오래 채무에 시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가치, 한 사건 때문에 다른 사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또 다른 정의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이 점에서 법이 좇는 정의란 현실적인 의미에서 최적의 정의이지 이상적인 정의는 아니다.
사법부 또는 법관 개인이 불의한 권력에 맞서 판결한 사례가 우리 사법사에 존재한다. 일부 논란이 있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재권력에 맞선 진보당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군인의 정당한 국가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행정부도, 입법부도 외면한 진실과 정의를 사법부가 앞장서 밝힌 사례였다.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과 평등이라는 핵심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할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우리 사회는 이제 당연하고 핵심적인 가치가 행정부나 입법부에 의해 무시될 수 있는 단계는 많이 지난 듯하다. 지금은 어느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정의를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는 일종의 제로섬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 사법부가 행정부나 입법부에 대해 판단할 때는 선과 악을 명쾌히 구분하기보다는 최적의 선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삼권분립의 의미를 생각하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삼권분립은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운 개념이 되었다. 그럼에도 삼권분립은 근대 정치의 핵심 원리다. 일차적으로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지만, 이 원칙이 삼부의 상호 도외시를 말하지는 않는다. 사법부는 행정부의 행정적 현실을 고려하고, 행정부는 사법부를 존중해야 한다. 명백히 불의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법적 판단에 앞서 행정부와 입법부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현실적 대안 마련 가능성을 함께 고심해 봐야 한다.
스페인 대법원은 이 점에서 정의를 좇았으나, 결국 불의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법부가 추구하는 정의는 이상적 결과의 즉각적 구현보다는 현실적인 최선의 정의를 추구함에 있다. 이러한 가치가 지켜질 수 있도록, 사법부의 신중함과 사법부에 대한 존중이 모두 요구되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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