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골퍼는 둘로 나뉜다. 우승을 해본 선수와 해보지 못한 선수. 코스와 경쟁자, 자신을 상대로 고독한 승부를 이겨내고 우승컵을 거머쥐는 순간이 스타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 한 뼘의 벽을 넘지 못하면 아무리 꾸준히 상위권을 지켜도 '탑 티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프로 선수, 엘리트 체육인을 택한 이들의 숙명이다.
지난 6일 239번째 출전 대회에서 드디어 첫 승을 거둔 최예림(27)에게 그 어느 우승자보다 진심 어린 축하가 쏟아진 것도 그래서다. 이날 경기 포천시 포천아도니스CC에서 막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OK저축은행 읏맨오픈(총상금 10억원)에서 최종합계 10언더파 206타로 임희정에 1타 차 우승이 확정되자 현장에 있던 수많은 관계자와 골프팬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승 순간 활짝 웃으며 마치 '우승 경력자'같은 여유를 보였던 최예림은 7일 한국경제신문과 전화 인터뷰에서 "부모님, 후원사, 매니지먼트 등 관계자들 외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셔서 저는 더 행복하게 웃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제가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이제야 조금 보답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고 미소지었다.
◆"너무 잘하려 하지마" 한마디의 힘
올해로 정규투어 9년차인 최예림은 KLPGA투어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선수 중 하나였다. 빼어난 미모에 긴 팔 다리를 이용한 우아하면서도 힘있는 스윙으로 드라이버, 아이언 등 모든 클럽을 골고루 잘 쓰는 '육각형 골퍼'의 대표 주자다. 정규투어 데뷔 이후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며 직전 대회까지 총 238개 대회에 출전해 31억8433만 원을 벌어 누적상금 순위 23위에 올랐다.
하지만 단 하나, 우승이 없었다. 수차례 챔피언 조에서 우승에 도전했지만 9번 준우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우승 없는 선수 중 누적상금 1위 기록, 통산 상금 30억원을 넘긴 선수 가운데 우승이 없는 유일한 선수. 최예림에게는 영광스러우면서도 부담으로 작용한 기록이었다.
또래 친구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그에게 또다른 압박감이 됐다. KLPGA투어를 주름잡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뛰는 최혜진과 이소미, 이가영이 199년생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최예림은 "좋은 경쟁자이면서도 친구들이 우승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조급해졌던 것이 사실"이라며 "사람마다 피어나는 시간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때를 기다리자고 다잡았다"고 돌아봤다.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기회를 놓치는 최예림에게는 '뒷심이 약하다'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그 역시 누구보다 그 평가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6월, 맥콜.모나 용평 오픈에서 연장전에서 김민솔에게 패배하고 9번째 준우승을 거둔 순간은 최예림에게 터닝포인트가 됐다. "준우승 자체에 실망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9년차 선수로서 이대로는 안된다는 각성이 들었습니다."
최예림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와우 매니지먼트 이수정 전무가 그를 다잡았다. 박인비, 유소연의 전성기를 함께한 이 전무는 "나를 믿어라. 넌 해낼 수 있는 선수다"라며 변화를 제안했다. 이 대회를 앞두고 이시우 코치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한동안 중단했던 정그린 그린코칭솔루션 대표와 멘탈 코칭을 재개했다. 샷과 퍼트 모두 물이 오른 상태에서 최예림을 막고 있는 단 하나가 멘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 대표와의 코칭은 최예림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최예림은 "제가 사실 경기를 잘할 때도, 못할 때도 늘 불안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돌아봤다. 그에게 정 대표가 내린 솔루션은 단순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마. 필드에서 넌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필드를 니가 시험받는 곳이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을 뽐내는 곳'이라고 생각해 봐."
최예림의 메인 후원사인 휴온스의 윤성태 회장도 최예림의 부담감을 덜어줬다고 한다. 윤 회장은 최예림에게 "잘 된다고 자만해서도, 안 풀린다고 풀죽을 필요도 없다"며 "우승하지 않아도 된다. 최 프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격려해줬다. 후원사에 우승을 안겨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따뜻한 응원이었다.
◆"챔피언 퍼트 손맛 잊지 못해"
지난 6일, 최예림은 3타차 단독 선두로 여유있게 최종라운드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전날 밤 잠을 설칠 정도로 극도의 압박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지금까지 마지막 순간에 성공한 기억은 없고 실패한 기억만 있다보니 더 불안하고 걱정이 됐어요. 또다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와서 정 대표님과 통화하면서 마음을 비우려 애썼죠."
최종 라운드 중에도 최예림은 계속 "나 잘하고 있어. 괜찮아"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전반에 3타를 줄이며 한때 6타 차이까지 앞서갔지만 후반에 실수가 이어지고 임희정, 김민솔이 추격하면서 1타차 접전으로 바뀌었다. 최예림이 또다시 다 잡은 우승을 놓치는 악몽이 재개도리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최예림은 눈 앞에 있는 공에만 집중했다. 두번째 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리자 캐디는 "투 퍼트만 해"라고 속삭였다.
한때 퍼트는 최예림의 약점이었다. 2년차 때 넥센·세인트나인 대회 마지막 홀에서 짧은 퍼트를 놓친 기억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더 많은 연습과 훈련으로 극복해냈고 퍼트는 이제 최예림의 무기가 됐다. 올 시즌 최예림은 평균 퍼트 29.6회로 투어 11위를 달리는 강자다. 마지막 홀 그린, 그는 "거리를 보니 원 퍼트도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들었고 '붙이기만 하자'고 편하게 쳤다"며 "생애 첫 챔피언 퍼트의 손맛은 평생 기억날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9년간의 기다림 끝에 '챔피언'이 되는 한뼘의 벽을 넘어선 최예림은 이제 다승자를 꿈꾼다. "우승의 맛을 아는 선수답게 더 많은 우승을 하고 싶어요. 이번 대회에서도 후반 경기가 아쉬움이 남는데 다음에는 시원하게 몰아붙이는 우승으로 '최예림은 뒷심이 없다'는 말을 꼭 지워내고 싶습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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