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밍 경(Lord Laming, 1936.7.19~2026.7.15)
19세기 근대 국민교육이 시작되면서 계급-귀족주의 전통의 영국도 1870~80년대 공교육-의무교육을 제도화했고, 1944년 교육법(일명 Butler Education Act)으로 기본 틀을 구축했다. 이른바 3원제 교육 시스템이었다.
모든 학생이 만 11세에 '
이라는 학력 평가시험을 치러 사실상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시스템. 상위 약 15%는 문법학교(Grammar School)에 진학해 대학과 전문직 등 엘리트 경로를 밟고, 대다수 중위권은 일반 학교(Secondary Modern School)와 기술학교에서 블루칼라 경로를 밟게 하는 제도. 보편 교육과 공정 평가를 명분으로 사회 계급을 고착화-제도화한, 마이클 샌덜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판한 저 '공정주의의 덫'은 1965년 노동당 정부가 각 지방정부에 '11세 시험 폐지-종합학교' 시스템 도입을 권고한 이래, 귀족주의의 거센 저항 속에서도 더디게 개선돼갔다. 현재 잉글랜드 명문 그래머스쿨은 전체 공립 중학교의
1940년대 말, 저 시험에 떨어진 숱한 아이들 중 한 명이 중학교를 자퇴하고 방황하다 해군에 징집된다. 첫 정기휴가를 마치고 리버풀항에 정박한 함정으로 복귀하던 그는 공교로운 열차 고장으로 선로 위에서 발이 묶였다. 영국 해군 마지막 석탄 함정 중 하나인 'HMS 플랫홈(Flatholm)호' 밑바닥에서 석탄을 퍼 넣는 화구병(Stoker)이던 그 이등병이 귀대가 늦어질까 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 옆자리 한 신사가 말을 건다. 그렇게 둘은 열차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청년의 고향 뉴캐슬은 광업과 조선업으로 영국 산업혁명을 이끈 대표적인 중공업 도시였다가 1930년대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었다. 광산과 공장들이 잇달아 문을 닫으면서 실업률은 최대 70%에 달했다. 청년은 '
'이라 불리는 실업자 생존권 투쟁이 일어난 1936년, 그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집(pub) 고용 매니저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힘겹던 살림은 아버지가 2차대전에 징집되면서 더 악화해, 그는 어머니와 함께 전시와 전후 노숙 생활을 겪기도 했다. 그가 '11세 시험'에 합격했다면 그게 어쩌면 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2차대전 전후 영국 국민개병제(1949~60)에 따라 수병이 됐다.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뒤 이집트 수에즈 파병을 앞두고 들떠 있던 어느 날 그의 부대에 한 하사관이 찾아와 아무 설명도 없이 4명의 자원병을 모집했다고 한다. 이병 레밍이 얼떨결에 손을 들었고,
청년 병사의 딱한 사연을 듣고, 또 그의 성실하고 정직한 태도에 좋은 인상을 받은 신사는 청년에게 통신교육 과정을 소개하며 공부를 계속해보라고 조언한다. 하루하루 석탄과 씨름하며 자포자기하듯 지내던 청년은 귀대 후 틈틈이 '
' 통신강좌 교재로 독학을 시작했다. 리버풀 지역 보호관찰관이었던 그 신사는 그렇게 청년의 멘토가 돼 함정 입항 스케줄에 맞춰 참고서와 문제집 등을 항구 우편물 수령처로 보내 놓곤 했고, 함정 지휘관들도 그에게 자유시간을 챙겨주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해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청년은 1960년 더럼대(Durham Univ, 응용사회학)를 졸업했고, 이듬해 노팅엄셔의 보호관찰관이 됐다.
유년과 청소년기 경험으로 탄광촌의 가난과 범죄에 익숙했던 그 검정고시 출신 현장 하위직 공무원은 특유의 공감력과 성실성으로 이내 조직 안팎에서 주목받았고, 여러 자치주 사회복지국 주요 보직과 중앙 정부의 사회복지감찰국 국장을 거쳐 훗날 종신귀족(Life Peer) 상원의원이 됐다. 의원으로서 그는, 관료들의 타성과 제도적 타락을 고발하며 영국의 사회복지, 특히 아동복지의 원칙과 시스템을 구축한 주역이 됐다.
요컨대 그는 '하기 나름'이라는 말로 사적인 경험을 특권화하지 않고, 자신이 누린 우연과 행운을 제도화하고자 했다. '우리는 (작은 우연과 불운 탓에) 엘리트 트랙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낭비하고 있다.' 자신의 삶 자체를 통해 영국 사회복지의 가치와 가능성을 일깨운 '레밍 남작' 허버트 레밍(Herbert Laming, 1936.7.19~2026.7.15)이 별세했다. 향년 89세.
1961년 신참 보호관찰관에게 첫 임지인 노팅엄셔 탄광지역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상시적 가난과 범죄, 방치된 채 학대받는 아이들. 그는 범죄자의 생활 지도 감독이라는 본업을 넘어 전과자 가족(아동) 등 주변까지 챙기는 보호관찰관으로 명성과 실적을 쌓으며, 1968년 지역 보호관찰관실 부실장이 됐다. 그는 업무에 필요하다며 1964년 런던정경대(LSE)에 진학해 정신 보건대학원 심화과정을 수료했다.
1968년 사회개혁가 프레더릭 시봄(Frederic Seebohm) 남작이 위원장이던 사회복지 혁신위원회의 정책 제안 보고서(
가 발표됐다. 아동 복지는 아동위원회, 노인 복지는 보건국, 주거 문제는 주택국 등으로 파편화돼 있던 지방 복지 서비스를 일원화하라는 게 보고서 골자였다. 노동당 정부의 지역 단위 사회복지 통합 조직인 사회서비스국(SSD·Social Services Department) 체제가 1971년 출범했다.
레밍은 하트퍼드셔 사회복지국 부국장(1971~75)과 국장(1975~91)을 거쳐 1991년 존 메이저 보수당 정부의 보건부 사회복지감찰국(SSI·Social Services Inspectorate) 초대 국장에 발탁됐다. 지역 사회서비스국 전체를 지휘-감찰하는 기관의 수장이 된 거였다. 보수적인 영국 관료사회에서 그의 파격 승진은 적잖은 반발을 낳았다. 그가 하트퍼드셔에서 일하던 1989~90년 일어난 아동 성학대 사건 조사를 지휘하는 과정에서 혐의가 확정되기도 전에 아이를 가해 용의자인 어머니와 내연남으로부터 강제 격리시켜 보호한 사례 등 지나친 피해자 중심주의로 인권을 침해했다는 지적이 대표적인 예였다. 하지만 그는 아동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절차'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방임보다 책임을 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선제적 과잉 개입이 낫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일간지 가디언은 '(그 흠집도) 정부가 그를 사회복지감찰국 초대 국장으로 임명하는 데
고 썼다.
하지만 메이저 정부의 '작은 정부-공공 개혁'은 정부 감사기관들을 존폐 위기로 몰아갔다. '
' 된 그는 관 주도 감사 위주의 SSI에 서비스 대상인 시민과 수혜자들을 대거 참여시켜 직접 평가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선제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 덕에 그의 조직은 유지됐고, 오히려 시민 참여형 감사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았다.
그는 정파를 초월한 독립성과 청렴성 즉 '이념으로 증거(진실)를 가리지 않는,
'로서, 1996년 보수당 정부로부터 기사(Sir) 작위를, 1998년 신노동당 정부로부터 종신 귀족(남작) 작위를 받고 당연직인 상원의원이 됐고, 의회 본회의장 보수-노동당 구역 사이 중앙 교차석(crossbench)에 앉은 무소속 의원으로서 상원 무소속 대표(2011~15)와 상원 행정-예산을 총괄하는 상원위원회 위원장(2015~16)을 역임했다.
2000년 런던 하링게이 자치구의
가 보호자인 고모할머니와 그의 동거남의 상습 구타와 학대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난 클림비는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고모할머니의 제안과 부모의 설득으로 1999년 4월 런던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아동 복지수당이 주 목적이던 고모할머니 등은 한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방에 클림비를 방치하며 손발을 묶은 채 욕실 욕조에 가두고 자전거 체인, 심지어 망치로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2000년 2월 심각한 영양실조와 저체온증으로 숨진 클림비의 몸에는 128개의 상처와 흉터가 있었다. 두 가해자는 이듬해 1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영국사회가 경악한 사연은 따로 있었다. 아이가 숨지기까지 경찰과 사회복지국, 1차진료기관(NHS)이 무관심과 형식적 가정 방문, 가해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최소 12번이나 아이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아도, 영국은 산업혁명을 선도한 국가답게 아동 착취-학대를 근절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가장 선도적으로 시행한 국가 중 하나다. 아동 노동 시간과 노동 조건을 규제한 법(1802년, 'Health and Morals of Apprentices Act')을 맨 먼저 제정했고, 1889년 법(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 Act)으로 부모의 아동 학대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게 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가 출간된 해는 1837년이었다.
들끓던 여론에 밀려 정부는 클림비 사건의 원인과 대책을 모색하기 위한 공공조사위원회를 꾸려 레밍 경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18개월 뒤인
그는 한두 기관과 담당자 개인의 무능-무책임 탓이 아닌 국가 아동 복지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와 소통 부재가 결정적인 원인이라며 108개에 달하는 개혁 권고안을 발표했다. 노동당 정부는 그 보고서에 근거해 '아동법'(Children Act, 2004)을 개정했고, 전국 지자체에 아동 복지 전담 '아동 서비스 담당국'을 신설하고 관련 기관의 아동 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약 7년 뒤인 2007년 8월, 같은 자치구에서 17개월 된 영아 피터 코넬리(Peter Connelly)가 역시 생모와 동거남 형제의 잔혹한 학대 끝에 숨지는 사건이 재연됐다. '
는 척추와 다수의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고, 몸에는 50곳이 넘는 상처와 흉터가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코넬리 사건에서도 복지기관과 의료진, 경찰 등이 총 60회 이상 가정 방문을 하고 여러 차례 아이를 진찰했지만,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등 생모의 거짓말에 속아 학대 정황을 무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가해자 세 명은 중형을 선고받았고 자치구 아동서비스국장과 사회복지사 다수가 해임됐다.
영국 정부는 다시 레밍 경에게 그 사건의 원인과 대책, 2004년 개혁의 이행 상황을 전면 재검토해줄 것을 요청했다.
에서 레밍 경은 현장 복지사들의 과중한 업무량과 사기 저하, 여전히 삐걱대는 기관 간 소통과 무사안일의 관료주의 등의 원인과 함께 58개 권고안을 제출하며,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가 있어도, 현장 인력의 전문성과 책임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들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저 말은 빅토리아 사건 조사 보고서 발표 직후에도 그가 한 말이었다. 당시 레밍 경은 '(하지만) 관련 기관들이 적시에 개입해 아이를 살릴 수 있었던 기회 중 어떤 것도 특별한 감식 기술이나
'고 말했다. 피터 사건 직후 열린 런던 시의회와 자치구 사회복지국장단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아동 서비스의 질과 양이 여전히 부족한 현실에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자 레밍 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이 놀랐다는 사실이
.'
'제3의 길'을 선언하며 노동당을 보수화한 블레어 정부는 2004년 SSI를 해체하고 모든 복지 감사 업무를 통합한 사회돌봄감사위원회(SCSI)를 신설했고, 뒤이은 고든 브라운 정부 역시 2009년 SCSI마저 폐지하고 의료까지 통합한 의료-사회복지 감찰위원회(CQC)를 출범시켰다. 2010년 이래 보수당 정부는 금융위기 여파까지 겹쳐 더 강력한 재정 긴축 정책을 이어갔다. 중앙 정부의 지자체 교부금 삭감으로 지방 정부의 아동 서비스 예산은 실질 가치 기준 절반가량 격감했고, 그 추세는 코로나19 팬데믹
. 레밍 경은 '(돈이 없다고) 사회 복지 현장의 전문적 감시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은 전략적 실수'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상원위원회 위원장 시절인 2016년, 그는 국왕 승인을 받은 모든 법안 최종본을 양피지에 기록해 보관하는 1497년 이래
. 훨씬 실용적이고 내구성도 뛰어난 보존용 종이(Archiival Paper)가 많은데 매년 10만 파운드(약 1억 6,000만 원)씩 들여 양피지를 고집하는 건 예산 낭비라는 게 명분이었지만, 어쩌면 예산 타령으로 툭하면 (아동)복지를 희생시켜온 의회와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보수파 의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양피지 폐지안이 상원 행정위를 통과하자 당시 내무장관 겸 하원의원이던 매트 행콕(Matt Hancock)이 내각 예산으로 매년 양피지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개입하면서 일단락됐다.
그런 고집스러운 일면에도 불구하고 동료 의원들은 그를 '
상원 의장인 포사이스 경(Lord Forsyth)은 그를 '조용한 끈기가 모든 것을 바꾸고, 가장 온화한 사람이 가장 단호한 개혁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평했다. 보수당 상원의원인 트루 경(Lord True)도 '나는 레밍 경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곤 평소 레밍 경이 경험한 여러 우연-행운들과 함께 그가 자주 했다는 말 -'우리는 (여러 제도와 관행들로 사람들의 기회-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엄청난 인적 잠재력을 낭비하고 있다'-을 환기했다. 그의 여러 '우연' 중에는 1954년 수병 시절 한 하사관의 자원병 모집에 무심코 손을 든 것도 포함됐다. 그 우연을 환기하며 무소속 상원의원 키눌 백작(Earl of Kinnoull)은 허버트가 남긴 이 말을 전했다. '누군가 자원할 사람을 찾는다면, 손을 들어라.'
레밍 경은 사회-아동복지 현장에서 만난 동지 겸 활동가 에일린 폴라드(Aileen Pollard)와 1962년 결혼, 자녀 없이 해로했다. 바쁜 의정 일정과 두 건의 조사-보고서 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조발성 치매를 앓던 아내 곁을, 2011년 사별할 때까지 지켰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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