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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자기혐오를 멈추는 질문 [정문정의 대화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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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정문정 | 작가·'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저자 이틀간 종일 비가 쏟아졌다. 비가 연달아 온 뒤면 계절이 성큼 바뀌어 있는 걸 체감한다. 냉장고에는 마지막 남은 썸머킹 사과 한개가 있는데 아까워서 아직 먹어 치우지 않았다. 오래 보관한 초록 사과가 푸석해질 때쯤 아삭한 홍로가 나오고 얼마 뒤엔 과즙이 철철 흐르는 사과의 왕 감홍이 등장한다. 감홍. 감홍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무언가를 사기 전에 스스로에게 변명이나 합리화, 결심을 하게 된다면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증거이니 포기하는 게 소비의 원칙이지만 비싼 감홍은 예외로 하게 된다. '열심히 일하는데 이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이게 있을 땐 다른 간식을 안 먹으니까 크게 보면 돈을 아끼는 거야. 건강에도 좋잖아' 같은 이유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결국 결제 버튼을 누르고 만다. 붉은 사과를 떠올리게 되는 걸 보니 확실히 여름의 끝에 도착했나 보다. 어제부터는 긴팔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이번 여름에는 특기할 일이 있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첫 방학을 맞이한 것이다. 겨울과 달리 여름 방학은 한달밖에(?) 안 되기에 종일 돌봄을 신청하지 않는 패기를 부려 보았다. 이 결정에는 내가 부상을 당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아이와 장난을 치며 놀다가 티테이블이 쓰러지면서 발가락이 똑 부러졌는데, 어차피 작업실에 나갈 수 없으니 이참에 잠깐 전업주부로 살아보자는 마음이 함께 작용했다. 학교에서 하는 늘봄 수업만 신청했더니 아침 9시에 들여보낸 아이가 두시간도 안 되어 온다. 오전 중에 귀가한 아이와 점심을 먹은 뒤 책을 읽거나 보드게임과 레고를 하고 낮잠을 잤다. 4시가 되면 아이를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에 연달아 보냈고 6시에는 뜨거움이 덜해진 놀이터에서 뛰어다니게 했다. 나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그늘을 찾아 서성이고 있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땀 흘리는 아이를 구슬려서 집에 들어왔다. 아침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점심을 먹이고 놀고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서 놀고 저녁을 먹이면 밤이었다. 이번 여름 오래 돌본 사람은 아이만이 아니었다. 남편이 재직 중인 회사에 사고가 터지며 직원 몇몇이 연루되었다. 남편은 감사를 받는 과정에서 경험한 의심과 냉담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식성이 좋아 항상 통통하던 남편이 여위어 갔다.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고 벌건 눈을 끔뻑거리며 소파에 누워 있기만 했다. 그렇게 힘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는 내 말에도 힘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곧 정신과에서 처방해온 약을 먹게 되면서 적은 양이나마 다시 식사를 하게 되었고 가끔 웃어 보이기도 했지만 자려고 누울 때마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불안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밤마다 그 옆에 누워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떤지를 물어보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2주간 병가를 낸 남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해져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제일 먼저 하게 되는 행동은 곱씹는 일이다. 평소라면 의식하지도 않았을 상황도 덕지덕지 마음에 들러붙거나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게 된다. 큰일과 작은 일, 최근 일과 옛날 일을 가리지 않고 되새김질하는 남편에게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야 한다는 식으로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잘 해결될 거라는 내용의 월별 운세를 반복해서 읽어주기도 했는데 둘 중 더 효과가 있던 건 후자였다.(역시 미신도 신이다.) 잠들기 전까지 남편의 손을 꼭 잡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언과 미신과 스킨십을 병행하면서 그 시간을 함께 겪어냈다. 얼마 전,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게 되었다. 올해 초에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나쁜 일이 있어도 나쁜 날은 아니야'라는 책을 낸 적 있는데 관련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어서다. 진행자가 나를 앉히고 물었다. '작가님도 힘든 일, 힘든 날이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가까이에서 얼굴을 비추는 조명에 눈이 부셨지만 찡그리지 않게 조심하며 말을 골랐다. '최근에 생긴 습관인데요. 그럴 때 내 아이라면, 남편에게라면 뭐라고 말해줄까 생각합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일단 먹고 생각하자' '금방 지나갈 거야' '방법을 찾아보자' 같은 말이 주로 떠오르는데 저 자신에게도 그대로 해주려고 합니다. 그럼 좀 나아지더라고요.' 예전이라면 방학 동안 원고를 하나도 쓰지 못한 사실에 자책했을 것이다. 핑계 대지 말라고, 의지가 약하다고 스스로를 혼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돌보는 사람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비난할 일보다 격려할 일이 더 많았다. 돌봄의 말을 입 밖으로 내다보니 내 귀에 자꾸 들려오기도 했다. 나는 그걸 계속 말하고 유심히 듣는다. 그러다 보면 흘러간다. 폭염과 열대야도 또다시 떠나갔다. 가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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