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위가 곧 세계 1위인 분야가 두 가지 있다고들 한다. 양궁과 발레다. 양궁 국가대표 되기가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렵다는 건 엄살이 아니다. 발레 역시 우리 무용수들이 세계적 콩쿠르를 휩쓸기 시작한 지 오래고, 해외 발레단 주역으로 활약하는 무용수들 이름은 부르기도 숨찰 만큼 많아졌다. 하지만 그걸로 다 좋은 것일까.
지난달 말 세계 최고 발레단 단장들을 초청해 열린 서울 글로벌 발레 포럼에서, 미국 보스턴 발레 미코 니시넨 단장이 물었다. '이렇게 훌륭한 한국 무용수들이 왜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 봤나요?' 보스턴 발레엔 한국 무용수가 7명, 그중 3명은 수석이다. 한국 발레를 아끼는 그의 지적은 뼈아프다. K발레는 전성기라는데, 무용수들은 왜 한국을 떠날까.
발레 무용수의 전성기는 짧다. 20대에 꽃 피울 기회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 무용수가 자기 기량을 최대로 발휘할 전막 발레 레퍼토리를 갖춘 발레단은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UBC) 정도다. 입단부터 '하늘의 별 따기'다.
입단해도 녹록지 않다. 단원이 약 60명인 국립발레단의 연간 공연은 약 80회. 전막 발레는 연말 단골 '호두까기 인형'을 포함해도 한 해 5~6편에 전부다. 바늘 구멍을 뚫고 군무로 입단해도 기회는 드물다.
홈페이지와 연간 보고서 등에 따르면, 단원이 약 100명인 영국 로열발레는 2025~26시즌 약 140회, 단원 150명 정도인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POB)는 약 190회 공연을 올렸다. 이들은 한 작품을 2주 정도 공연하며 신예들에게 주역 기회를 주고, 예술감독이 공연 커튼콜 때 무용수의 승급을 직접 발표한다. 고전부터 창작 신작까지 다양한 공연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국립발레단은 드라마 발레 '인어공주'와 '카멜리아 레이디'도 단 5회밖에 올리지 못했다. 발레계 사람들은 우리 무용수들이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하고 싶은 작품 무대에 서기 위해' 한국을 떠난다고 말한다.
전용 공연장 문제도 크다. 우리 국립발레단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올린 공연은 30회가 안 되는 반면, 로열은 런던 코벤트가든, POB는 파리 가르니에와 바스티유에서 모든 공연을 소화한다. 단원의 예술적 역량이 아니라, 상시 사용할 극장을 전제로 설계된 제작과 재정 시스템부터 격차가 생겨난다.
춤은 인류 공통의 언어고, 발레는 그 언어로 완성된 예술 장르다. 우리 국민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발레단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국립발레단이 과감하게 신작 전막 발레에 도전하고 레퍼토리로 축적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 발레단 예산의 4%인 후원 비중이 훨씬 커져야 한다. 지금 한국 양궁 전성기의 밑바탕에도 한 기업의 체계적 지원이 있었다.
발레단의 수준을 결정하는 철학과 인프라가 중요하다. 한 무용 연구자는 '지금 우리 발레는 그때그때 꾸역꾸역 만들어낸 무대 앞은 화려하지만 무대 뒤는 텅 비어 있다'고 했다. 한정된 레퍼토리와 공연 기회, 폐쇄적 구조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지금 여행자들의 버킷 리스트에는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뉴욕의 링컨센터에서 보는 최고의 발레 공연이 올라 있다. 서울에 오는 여행자들이 국립발레단 공연을 버킷 리스트로 꼽는 날을 앞당길 수 있을까. 역량은 충분하다. 이젠 정책과 지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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