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저지른 가장 엉뚱한 충동 구매는 10여 년 전 도쿄 나카메구로역 건너편 후미진 골목에서 산 페그보드다. 나무판에 규칙적으로 구멍을 뚫은, 흔히 말하는 타공판이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작은 사이즈를 샀지만, 관광객 입장에서 널따란 나무판은 갖고 다니기도, 갖고 돌아오기도 난감했다. 하지만 이사를 앞두고 있던 그때, 인테리어 숍 벽면을 가득 채운 다양한 페그보드를 마주하며 미술관의 어느 작품 앞에서 느낄 법한 전율을 경험했다. 이 충동은 남자의 본능이었다.
오늘날 페그보드는 이케아나 아기자기한 소품 숍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공간을 '꾸미는' 용도로 친숙하다. 사무실 파티션에 페그보드를 달아 아기자기하게 꾸민 동료도 있다. 그런데 페그보드는 애초에 보여주기 위한 용도의 물건이 아니었다. 20세기 초 거친 남자들의 노동 현장에서 톱, 렌치, 드릴 같은 공구를 일목요연하게 관리하는 용도의 자재였다. 못을 뜻하는 peg와 판을 뜻하는 board의 조어로 페그보드다. 이 물건이 대중화된 건 1950년대 미국 가정의 차고나 지하실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다.
남자들은 페그보드에 공구 등 좋아하는 물건을 걸어두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불특정 다수에게 발신하는 SNS 시대의 문법과는 보법이 달랐다. 소유한 물건과 소통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전시한 주체와 관객이 동일한 셈이다.
그래서 소위 맨케이브라 불리는 공간의 한쪽 벽에는 어김없이 이 판이 붙어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존 윅' '씰 팀' '김부장' 같은 액션 콘텐츠의 제작진은 총기류를 남자의 사적 공간에 먹음직스럽게 진열해둔다. 사실 물건은 넣어두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고 청소도 줄어든다. 그럼에도 굳이 꺼내 걸어두는 건 물성이 주는 위안 때문이다. 사이즈별로 드라이버나 드릴 등의 공구가 죽 늘어선 미국 영화 속 차고나, 배우 이태곤의 집 방 한쪽에 걸린 다양한 종류의 낚싯대와 관련 용품 등은 자랑을 위한 목록이 아니라 남자를 설명하는 명함이다.
페그보드는 취향, 성취, 능력을 확인하는 회복의 거울이다. 누구나 남자의 동굴까진 아니더라도, 집 안 한쪽 벽면 정도는 얻을 수 있다. 매일 나 자신을 마주하는 벽, 남자에게는 그런 벽이 하나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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