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국회의원

[류호정의 톱밥 먹는 중입니다] [29] 천천히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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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신촌의 대형 카페에서 주말 알바를 했다. 건물을 통째로 쓰던 그 카페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음료의 재료와 비율을 모두 암기해야 하는 제조 업무는 신입이 맡을 수 없다. 나는 주로 계산대를 맡았다.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는 쉬웠다. 문제는 파르페 어쩌고 스무디 어쩌고들이었다. 포스기에서 찾기도 어렵다. 결제할 때 적용하는 각종 할인 시스템은 열심히 외워도 다음 주말이면 잊어버렸다. '천천히 해주세요.' 카운터 앞에서 사투를 벌이던 어느 날이었다. 그저 신용카드만 주고받는 세상 담백한 관계를 맺는 중에, 한 손님이 그렇게 말했다. 포스기 위에서 허둥대던 손길이 차분해졌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 '배려의 말'을 입에 붙이려 노력하게 됐다. '크리스마스에 받아도 됩니다.' 얼마 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가구 제작이 늦어질 것 같다는 나의 연락에, 한 고객이 그렇게 말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충청도식 화법인가 싶었지만, 주문자는 부산 분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참 재밌게도 하셨다. 그래서 더 송구했다. 상황은 이랬다. 제작을 시작한 때는 장마철이었다. 자재들이 비에 젖어 배송되지 않도록, 맑은 시간대를 기다리다 며칠을 보냈다. 겨우 진도를 나가고 있는데, 설상가상 공방 천장에서 빗물이 샜다. 하필 작업을 끝낸 부분이 또 물을 먹었고, 다시 만들어야 했다. 내가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철물 관련 업체들이 여름휴가를 떠났다. 나름 탄탄했던 계획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배송도 만만치 않았다. 공방이 있는 남양주, 배송지인 부산뿐 아니라 둘을 잇는 어느 곳에도 비가 오면 안 됐다. 내 픽업트럭은 밀폐형이 아니니까. 배송일 날씨를 일주일 전부터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내 결혼식 날씨도 그만큼은 살피지 않을 것 같았다. 예보와 달리 전날부터 비가 왔고, 나는 기상청을 힘껏 원망했다. 늦은 밤, 비가 그친 틈을 타 혼신의 힘을 다해 가구를 포장하고 적재했다. 다행히 잠깐씩 내린 소나기는 가구를 해치지 못했다. 우리는 일을 맡기고선 끊임없이 확인한다.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고, 언제 되느냐고 묻는다. 질문이면서 재촉인 그 말들로 알바도 목수도 빨라지지 않는다. 아니, 빨라질 수가 없다. 혼란한 머리 때문에, 젖은 나무 때문에 가장 조급한 건 그들 자신이다. 어쩌면 가장 실수하기 쉬운 상태일지 모른다. 배려의 말은 힘이 된다. 조급하지 않을 힘, 실수하지 않는 힘이 된다. 또한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신뢰였다. 믿어주는 사람의 일은 대충하기가 더 어렵다. 나는 더 잘하려고 했고, 공들여 만든 벤치는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제자리에 놓였다. 그래도, 그러므로 내년에는 장마 전에 미리 나무를 주문해야겠다.
[류호정의 톱밥 먹는 중입니다] [29] 천천히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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