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디세이'가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모았다. 영국·미국에서도 관심이 여전히 뜨겁다. 이 영화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그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바탕을 둔 이야기다. 약 3000년 전 탄생한 고전이 21세기 거장의 손끝에서 또 하나의 명작으로 거듭난 것이다. '오디세이아'가 이토록 오랜 세월 생존한 힘은 무엇일까.
뼈대는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유혹과 시련, 방랑과 기다림, 귀환과 정체성이다. 이야기의 형태는 시대마다 변했지만 그 속에 담긴 서사의 DNA는 살아남아 다시 태어났다. 중세의 단테는 '신곡' 지옥편에서 오디세우스를 불러냈고, 그는 이타카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지식과 경험의 한계에 도전하는 탐험가로 그려졌다. 19세기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은 시 '율리시스'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늙은 오디세우스를 모험을 꿈꾸는 인물로 재해석했다. 20세기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오디세이아'의 서사적 구조를 1904년 더블린의 하루로 옮겨 '율리시스'를 탄생시켰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이다.
이처럼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서 중세·근대를 거쳐 현대의 문학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이 이야기를 이어온 사람들이 그리스인만이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의 창작자들이 각자의 언어와 상상력으로 재창조하면서 '오디세이아'는 특정 민족의 고전을 넘어 세계인이 함께 읽고 다시 쓰는 서사가 되었다. 끊임없는 재해석과 재창작은 이것을 살아 있는 고전으로 만든 힘의 원천이다.
세계에는 수많은 언어와 문화가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이야기의 폭은 제한적이다. 미국 로체스터대의 국제문학 프로그램인 'Three Percent'에 따르면, 미국에서 출판되는 책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3%, 소설과 시로 범위를 좁히면 약 0.7%에 불과하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길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으며, 비영어권에서 만든 이야기가 세계의 주류 문화에 자리 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류는 이러한 문화 비대칭성의 시대에 찾아온 단비와 같다. 세계의 팬들은 한류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한국어를 배우고, 자막을 만들고 번역하며, 각자의 문화와 상상력을 더해 다양한 방식으로 한류를 재해석하고 재창작해 왔다. 바로 이것이 한류가 지속 가능성을 갖는 핵심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한류의 다음 시대를 열 중요한 키워드는 다양성, 개방성, 그리고 포용성이다.
한류의 개방성과 포용성은 한국어 자체에서 이미 드러난다. 2021년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등재된 'mukbang(먹방)'과 'chimaek(치맥)'을 보자. '먹방'은 '먹다'와 '방송', '치맥'은 영어 'chicken'의 '치'와 '맥주'의 '맥'을 결합해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언어적 자원을 자유롭게 가져와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낸 사례다. 두 단어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다.
문화가 국경을 넘을 때 그 문화 속 언어도 함께 퍼진다. 다른 언어의 화자들이 한국어를 빌려 말하고 쓰며, 때로는 의미를 확장하기도 한다. 한류 역시 그랬다. 한국적인 것에서 출발했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참여하고 번역하고 재구성해 왔다. '케데헌'이 대표적 사례다. 그 영화에는 K팝과 아이돌 문화뿐 아니라 호랑이와 까치, 저승사자, 음식과 도시 풍경 등 한국적 문화와 이미지가 곳곳에 녹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한국적인 것'으로 전시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세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성장과 우정, 정체성 수용의 이야기로 재창조했다.
한류가 꾸준히 성장하고 오래 가려면 이런 힘을 키워야 한다. 한국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세계에 문을 여는 것은 상반되는 가치가 아니라 공존의 조건이다. 분명한 문화 DNA를 간직하면서도 누구나 자유롭게 해석하고 변주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을 때, 이야기는 더 멀리 여행하고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오디세이아'는 그리스에서 태어났지만 단테, 테니슨, 조이스, 그리고 놀런 감독을 거치며 세계인의 이야기로 거듭났다. 한류도 '우리의 이야기'를 넘어 '모두의 이야기'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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